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묜 부됸니 (문단 편집) == 평가 == 현대에 이르러 부됸니는 근대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스탈린과의 친분만으로 승진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무능한 소련군 수뇌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독소전쟁 당시 키예프에서 벌인 실책은 어떤 변명으로도 덮을 수 없는 사례.[* 물론 부됸니가 직전까지만 해도 다른 전선에 부임하고 있었으며, 실질적으로 그가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 1달도 되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 점을 알고 필요한 게 있느냐 묻던 사령부에게 '''경기병 줘'''라고 답한 건 틀림없는 실책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이 바로 '''"[[말박이|말 엉덩이만 아는 사람]]"'''. 이조차 보로실로프에 비하면 무척 나은 편으로, 보로실로프는 아예 '아무 쓸모도 없는 자'라고 까였다. 물론 부됸니 입장에선 이런 비교 자체가 억울할 게, 부됸니는 기병이라는 자신의 전공 분야 안에선 확실히 '''세계구급의 전문가'''였다. 독소전쟁에 접어들며 군사적 능력을 발휘한 사례가 아예 없다시피한 보로실로프와 달리, 부됸니는 원래 자기 위치에선 밥값을 확실하게 하며 성장한 인물이었기 때문. 그의 비극은 기병이라는 전공 분야 자체가 도태되었던 탓이었지, 부됸니 개인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됸니와 보로실로프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부됸니는 독소전쟁 당시에도 기병, 나아가서는 그 연장선상인 우회기동 등에 대해선 여전히 세계구급 전문가 특유의 안목을 보여주지만 보로실로프는 러시아 내전 당시 발휘했던 군사적 능력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 대규모 국제전인 독소전쟁과 어디까지나 내전에서 활약한 수준에 불과한 보로실로프의 경험 사이에 있는 차이 때문이라 말하기도 힘든 게, 러시아 내전은 말만 내전이지 실제로는 서구 각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 전문가들이 두각을 드러낸 일종의 국제 대리전이었고 보로실로프는 비록 정치장교 출신이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에 적지 않은 활약을 올렸기 때문.] 당장 후세의 입장에서 가장 정답에 가까운 해답을 낸 천재라 불리는 [[구데리안]]의 전차 기동전 구상 역시 그걸 적용한 독일에서도 개념이 너무 모험적이라고 큰 반발을 사고 있었으며, 1차대전의 전훈을 몸으로 체득한 상급지휘관들 대다수는 현실을 모르는 젊은이의 치기에 따른 오만한 독단으로 취급했다. 한 마디로, 기껏 수송대의 일종이었던 트랙터 부대에서 출발한 주제에 기병이나 포병 등 전통적인 1선 전투 병과 장교들을 들러리로 만드는 이론이다보니 군 내부에 전반적으로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단순히 그 뿐이라면 선구안이 있던 [[구데리안]]과 그를 따라오지 못한 독일 지휘관들 사이의 갈등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군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집단인 만큼 상당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이라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상기한 문제점 때문에 구데리안은 이론 도입 이전은 물론이고 전공을 올린 이후에도 군 내부 평가는 최악이었고, 그의 커리어는 평탄하지 못했다. 만약 히틀러가 프로이센 출신의 군 상층부를 불신하고 견제하기 위해 독단적으로 밀어주지 않았다면 구데리안 또한 이론가 중 한 명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 마디로, 구데리안의 선구안이 정답에 가까웠던 건 틀림없지만 '''그건 구데리안이 대단했던 거고 그조차도 운이 좋지 않았으면 묻혔다.'''] 키예프에서 겪었던 패배 또한 후퇴나 부대 이동을 인정치 않고 현지 사수를 명령한 스탈린의 명령 때문이다. 물론 모든 전선에서 대규모 후퇴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최고 사령부가 내릴 수 있는 명령은 현지 사수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 책임을 지는 것 또한 최고 사령부가 되어야 한다. 한 마디로, 키예프의 패배를 전적으로 부됸니 때문이라 칭하는 건 일종의 책임 면피 이상이 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해외의 군사 전문가들은 일관적으로 키예프에서 발생한 패배 원인은 상기한 여러 요소들을 고려하더라도 스탈린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는 편이다. 하다못해 붉은 군대가 의견 상신과 반영에 적극적인 조직도 아니고, 부됸니는 그런 상황에서도 후대에서 볼 경우 정답이었던 자신의 의견을 올렸으며, 그런데도 거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 당장 유능한 기병 장교였던 부됸니가 우회기동의 무서움을 모를 리도 없었다. 실제로 관련된 의견을 최고 사령부에 진언하기도 했거니와, 그게 기갑 병과가 생기기 전부터 기병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전차군의 가치를 알고 있었나 하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있어도, 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는 적이 아군의 보급선과 후퇴선을 차단하려고 하는 건 '''기병 장교'''가 보기엔 너무나도 이유가 명확한 행동이다. 주변 지역에서 가용한 소련군은 모두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밀집하거나 시간을 벌기 위해 현지를 사수하는 등, 둘 중 하나인 상황에서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고 있던 그는 사석 취급받은 자신의 부대가 포위섬멸당하기 전에 군대를 철수시키고 싶었지만 당시 상황 상 그건 불가능했다.] 하다못해 포위된 전선에서 절망적인 사투를 벌여서 제 2의 레닌그라드를 만들었다면 전설적인 명장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겠지만, 서쪽엔 발트해, 동쪽엔 라도가 호수가 위치하여 전면전선이 매우 좁았던 레닌그라드와 평야 한중간에 위치한 키예프의 지형적 차이가 너무 큰데다 결정적으로 '''기병 기동의 전문가'''인 부됸니에게는 부적합한 임무였다. 그의 전문대로 유격전 임무를 맡았다면 또 모르겠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방어전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비난하기엔 정상적인 혹은 소위 말하는 명장이라 불리는 인간들 중에서도 그 상황에서 키예프를 사수할 수 있었을까 하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장 그 독일군도 밀려나가는 상황이 되자 모든 전선에서 병력들이 증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 그나마 버틴 게 바로 그 유명한 총통의 소방수 [[발터 모델]]인데, 이 양반도 결국 전쟁 마지막엔 포위선 안에서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이런 상황은 개인이 유능하고 무능하고 이전에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였다고 평할 수 있다.] 결국 부됸니가 소환된 이후, 키예프를 지키던 서남방면군은 뒤늦게 철수하려다 포위되어 섬멸당하고 말았다. 스탈린 입장에서 보자면 부됸니의 군을 사석으로 삼은 덕분에 구데리안의 기갑군까지 추가로 묶어둘 수 있었고, 덕분에 모스크바 방면을 향한 압박이 완화되어 남부 전선군이 전멸하는 사이 극동에 배치되었던 정예군을 모스크바로 소환해 독일군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냥 그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키예프에서 부됸니가 더 버티거나 적을 역으로 섬멸했다면' 혹은 '부됸니가 무능해서 휘하 남부군이 전멸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는 셈. 다만, 그렇다고 해서 부됸니가 독소전쟁 당시에도 명장 축에 든다 말하기 힘든 건 자명한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 분야였던 기병과, 그 역할을 비슷하게 수행하고 있는 기갑군에 한하여 그 통찰력이 남아있었다는 정도. 실제로 후배 원수이자 실질적으로 독소전의 승리를 이끈 [[게오르기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의 회고록에서 부됸니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래도 코네프는 부됸니가 전혀 발전이 없었다고 완전 혹평을 했지만, 주코프는 그나마 그의 근무 태도나 성실성엔 후한 점수를 줬다. 말 그대로 노력은 했지만 그 노력 분야인 기병 확충이 정작 '''기병 병과 자체가 나가리되면서''' 무능한데 노력하는 부류가 되어버린 케이스. 이러니저러니 해도 러시아 내전 당시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부됸니는 연령상으로나 커리어상으로나 [[전성기|명장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충분했다]]. 용맹함이나 지휘력, 가혹 행위가 극심하던 러시아 제국의 군인 출신인데도 혁명 이후 휘하 병사들의 지지를 얻어 지휘관 자리를 역임한 인망도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활약 또한 출중했다. 그 스탈린이나 트로츠키마저 레닌의 몽상이라 경악한 '전쟁을 통해 세계 각국을 소비에트화한다'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무력 통합책]]을 전 인민이 환호하는 일대 사업으로 바꿔 다른 정치가들조차 말을 바꾸게 한 건 바로 부됸니의 제1기병군이 벌인 활약이었다. 전간기 당시 부됸니가 마치 신화적인 영웅처럼 묘사되었던 점에 대해 흔히들 대숙청 당시 모가지가 썰려나간 이들을 제외하면 띄울 만한 사람이 부됸니밖에 없었다거나,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던 '낭만적인' 기병대 장교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평하고 이는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 이상으로 부됸니 휘하 제1기병군이 '''실제로 그만한 위업을 세웠던''' 점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이후의 코마루프 전투에서 겪었던 패배 또한 본질적으로는 어마어마한 전공 탓에 낙관으로 젖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바르샤바 점령 시도 실패를 뒷수습하기 위하여, 나아가서는 후퇴하던 부대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기 위하여 투하체프스키가 직접 지시한 작전이었다. 물론 부됸니의 커리어에 있어 코마루프 전투가 기록적인 대패인 건 확실하지만, 애초에 패배한 군대의 후퇴를 위해 옆을 찌르는 전술 자체가 성공 가능성은 커녕 만일 상대가 대비하고 있다면 전멸조차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숫적 이점은 있었으나 다시금 폴란드군의 포위를 돌파해 퇴각한 부됸니에게 필요 이상의 감점이 붙을 여지는 아무래도 적다. 한 마디로, 군인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훌륭했지만 독소전을 포함한 2차대전 시기엔 전장의 패러다임 변화가 너무 빨랐던 게 문제가 되는 인물. 당장 기갑전의 선두주자였던 독일조차 여전히 완전한 기계화 부대를 보유하지 못했을 정도로 당시 기병대에서 기갑부대로 나아가는, 기병대의 도태 속도는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지나치게''' 빨랐다. 비슷한 사례인 항공모함과 비교하더라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부됸니는 일종의 수송대였던 트랙터 부대가 기갑사단으로 재편될 시기엔 이미 나이가 너무 많고 계급이 지나치게 높아 이제 와서 '실험적인' 부대에 낄 짬도 아니었다. 요컨대, 기갑에 적응하고 나발이고 애시당초 기갑과 접할 여지도 없었던 셈.[* 물론 기갑과 접하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기갑화를 반대한 건 어디까지나 기병 병과를 중시했던 스스로의 판단 내지 기갑부대를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 스스로의 생각 때문이었으니, '기갑부대와 접하지 못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독소전 당시에도 그가 기갑부대 대신 스스로 자처해 기병대를 고집한 이유 정도로 파악해야지 부됸니가 기갑부대와 접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고 호도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후 빠르게 임무가 교대되어 1선 전투병과가 아닌, 수송을 담당하게 된 기병대를 역할에 맞게 편제하는 일에도 기여했으니 기병 장교로선 마지막까지 자기 몫은 하다가 갔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런 부됸니의 행적에 대해 '''딱 국내용 수준'''으로 평가절하하는 이들도 있다.] 스탈린도 상술한 사정이 있고,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던 만큼 딱히 부됸니에게 실패에 대한 책임은 크게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숙청 이후 붉은 군대 내부에 소련 혁명 당시부터 전공을 쌓아 군을 대표한다고 할 법한 인물이 마땅히 없었던 점도 있고, 러시아 내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소련 건국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까지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므로 부됸니는 독소전 당시 이런저런 실수와 큰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소련의 국가적 영웅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였고, 퇴물이 되었다 한들 '''명성만은''' 있었던 만큼 스탈린도 그 이상 부됸니를 크게 대우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부됸니는 이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3회 수훈했지만, 모두 보로실로프처럼 스탈린 사후 수여받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